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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2. 22世 〉20. <부정공>운암거사휘연신묘비(雲巖居士諱淵信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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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부정공>성와처사휘연함행장(誠窩處士諱淵咸行狀)
誠窩處士諱淵咸行狀 公諱淵咸字汝一誠窩其號也惟我玉川趙氏以高麗侍中諱璋爲肇祖三傳至諱元吉號農隱與圃牧齊名是生諱瑜號虔谷以麗朝副正不膺我 朝徵命至孫相好亭諱智崙兄弟四人友篤有春津家風累傳至諱時一進士遊尤庵宋先生門於公九世以上也 高祖諱禮淳曾祖諱在益祖諱禹錫繕工監役 贈佐郎孝子旌閭考諱達鉉號晩洲妣咸安尹氏雙檢女繼妣河東鄭氏淳鐸女公以 高宗庚子六月十六日生于江村世庄性度寬洪言語簡重自幼己知事親之道事無專制行不由己惰僻之氣不設于身體叱咤之聲不及於犬馬或有不安節行不翔笑不矧期於復膳乃己及至大故其饘粥之節哭泣之哀以致吊者大悦治家有度謹守世業不以修潤爲心惟以發揮先懿爲心故開門以延賓捐廩而撫窮建塾立師敎子義方以至遠近來學多施厚意伐石置田一遵父敎以至相好先亭百年未遑之事獨自負擔寤寐殫誠克復舊日面目宗族信之鄉黨慕之理固然也其賛美之意族大父一軒翁己記之詳矣何必贄述大節如此小節雖略之可也己丑九月二十日考終于寝壽得五十雙岩桃木村右高樓峰下負丑原其藏也配濟州梁氏鵬煥女育六男東胄東弼出爲叔父後東瓚東淮東澳東淳餘幼不盡錄噫公生詩禮家庭兼承箕裘故業其天品之高所養之正無愧古人而克享遐齡則措諸事業必有可觀而皇天不假其年局於短造豈非可惜也耶雖然幸有哲嗣在前方面活躍不下於公在世之日則信乎不食之報將源源無窮也己長胤東胄要余記顧念非但宗誼所在其令五第皆入大學卒業成章世幾多人余每向人稱道者也是以不敢以不文固辭略陳愚見以俟高明者採擇焉 戊申七月 日 族孫 東勲 謹狀 성와처사휘연함행장(誠窩處士諱淵咸行狀) 공의 휜 연함이요, 자는 여일(汝一)이며, 성와는 그 호이다. 우리 옥천 조씨는 고려시중 휘 장(璋)을 비조로하여 三전하여 휘 원길(元吉)의 호는 농은인데 포은 목은과 더불어 이름을 나란히 하였고 생휘 유(瑜)의 호는 건곡인데 고려 부정으로 이조의 부름에 응하지 아니하였으며 손자 상호정 휘 지륜(智崙)은 형제 四인이 우애가 독실하여 춘진 가풍이 있었고 여러번 전하여 휘 시일(時一)은 진사로 우암 송선생 문하에 유학하였으니 이상이 공의 九세 이상이다. 고조 휘 예순(禮淳), 증조 휘 재익(在益), 조 휘 우석(禹錫)은 선공감역 증좌량인데 효자 정문을 받았고 고 휘 달현(達鉉)의 호는 만주요, 비는 함안 윤씨 쌍검(雙檢)의 따님이요, 계비는 하동 정씨 순탁(淳鐸)의 따님이다. 고종(高宗) 경자년(庚子年一九○○) 六월 十六일에 공은 강촌 세장에서 출생하였는데 성품과 도량이 너그럽고 언어가 간결하고 신중하여 어려서부터 이미 어버이 섬길 도리를 알아 일을 전결하지 아니하고 자의로 출입하지 아니하며 게으르고 괴벽한 기운을 몸에 갖지 않고 꾸짖는 소리가 개와 말에도 미치지 아니하며 혹 병환이 나시면 함부로 걷지 않고 이가 드러나도록 웃지 아니하고 식사를 하신 뒤에 그만 두었다. 그 상을 당하여는 그 전죽의 절차와 곡읍의 슬퍼한 것으로서 조문온 자를 크게 감복케 하였다. 집을 법도 있게 다스려 삼가 세업을 지키며 닦고 빛을 내기로서 마음먹지 않고 오직 선덕을 발휘하기를 일삼은 고로 문을 열어 손님을 맞이하고 창고를 헐어 궁한 자를 어루만지며 서당을 세우고 스승을 맞이하여 아들을 옳은 길로 가르치니 원근에서 와서 배운 자에게 많이 두터운 뜻을 베풀었다. 돌을 세우고 제전을 둔 것은 한결같이 父訓을 따른 것이요, 상호정을 백년 동안 이루지 못한 일을 홀로 스스로 부담하여 자나 깨나 정성을 다하여 능히 옛날 면목을 회복하니 종족이 믿고 향당이 사모한 것은 이치가 진실로 그런 것이다. 그 찬양한 글을 족대부 일헌옹이 이미 자상히 기록하였으니 어찌 반드시 더 보태겠는가. 대절이 이와 같으니 소절은 비록 줄여도 좋을 것이다. 기축년(己丑年) 九월 二十일 향년 五十세로 고종하니 쌍암 桃木村 오른쪽 高樓峰 아래 丑坐原에 안장하였으며 부인 제주 양씨(濟州梁氏)는 붕환(鵬煥)의 따님이다. 아들은 동주(東冑), 동필(東弼), 동찬(東灒), 동회(東淮), 동욱(東澳), 동순(東淳)인데 동필은 숙부의 후사로 출계하고 나머지는 다 어리어 기록하지 아니한다. 아, 공이 시예의 가정에 생장하고 겸하여 세업을 이은 고로 그 천품의 높이와 기른바의 바름이 옛 사람에게 부꾸러움이 없고 능히 장수하였으면 모든 사업에 있어 반드시 가히 볼 것이 있을 것인데 황천이 그 나이를 빌려주지 아니하였으니 어찌 애석하지 아니한가. 비록 그러나 다행히 어진 윤가가 앞에 있어 여러 방면으로 활약한 것이 공이 세상에 계신 날보다 못하지 아니한 즉 갈지 아니한 보시가 장차 계승하여 다함이 없을 것을 믿을 따름이다. 사자 동주(東冑)가 나에게 장문을 요청하는데 돌아보건대 다만 종의만이 아니라 그 다섯 아우로 하여금 대학에 들어가게 하여 졸업하게 문채를 이루었으니 세상에 이런 분이 몇 사람이나 될까. 내가 매양 사람을 대하여 칭송한 자가 다 이러함으로 감히 글을 못한다고 굳이 사절하지 않고 대략 우견을 진술하여 고명한 자의 채택을 기다린다. 족손(族孫) 동훈(東勲)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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